‘창작의 정석’ 망각한 고교생들 문예공모 표절-변칙 응모 판쳐

  • 입력 2006년 1월 20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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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등학생 문예공모전 심사는 심사가 아니라 ‘수사(搜査)’예요.”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 문예공모전과 백일장에서 남의 글 도용과 표절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상당수 대학이 입학 전형에서 입상자들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특기생 입학 혜택을 줌에 따라 문예공모전 열기가 과열되면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부산 모 대학은 지난해 5월 문학 특기생으로 이 대학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이던 김모(22) 씨의 입학을 취소했다. 김 씨는 여고생이던 2002년 한국작가교수회의가 실시한 제1회 전국고교 소설 백일장에서 단편소설 ‘바리데기 꽃’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경력을 인정받아 입학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사실은 작가 이용석 씨가 쓴 소설을 인터넷에서 보고 전체를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지난해 이 백일장에서 본심에 오른 한 고교생의 작품은 이미 이 학생이 다른 문예공모에서 입상했던 작품임이 드러나 ‘변칙 응모’로 탈락됐다.

작가인 이병렬 숭실대 겸임교수는 “고교생 대상의 문예공모 행사들에서 표절 등 변칙 응모를 의심할 만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며 “당일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 백일장의 경우 심사위원들이 특히 골머리를 앓는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대상의 문예공모는 대학, 문학단체, 문학지들이 주로 주관하는데 1년에 100개 이상이 열린다. 여기에 문학과 관련 없는 청소년단체들까지 보장할 수도 없는 ‘입상자 가점 혜택’을 내세우며 우후죽순으로 행사를 열고 있다. 입상자에 대한 혜택 유무는 대학에 따라, 문예공모의 권위에 따라 다르지만 서울대를 제외한 상당수의 대학이 문예공모 입상 가산점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를 겨냥해 시중에는 ‘문학 입시 가이드’류의 자료집까지 나왔고, 기출문제(백일장에서 제시된 작문 제목)를 갖고 ‘입시 공부하듯이’ 준비하는 학생이 많다.

이 때문에 백일장에서 흔한 제목이 제시될 경우 응모작의 수준이 현격하게 올라간다. 대회장에서 글을 써 내야 하는 백일장과 집에서 써서 응모하는 일반 문예공모 작품 간의 수준도 큰 차이를 보인다.

청소년들의 사고 능력과 문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입된 문예공모 입상 가산점 제도의 취지가 왜곡돼 또 다른 형태의 입시 과열을 빚고 있는 것이다.

문예공모 입상 가산점을 받은 학생이 국문과, 문예창작과가 아닌 이른바 인기 학과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

시인인 김혜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한 명문대에 출강해 문예창작 특기생들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데 수준이 낮아서 (과연 특기생 자격이 있나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며 “최근 고교생 문예공모에선 표절 가능성이 있는 글을 ‘수사하듯’ 가려내는 게 주된 일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작가 이용석 씨는 “청소년 대상 문예공모의 경우 문예반 지도 교사가 학생 본인이 쓴 글임을 확인한 후 응모하도록 해야 하며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들의 경우 면접을 통해 작의, 주제, 표현능력 등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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