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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남자들]<1>가정의 외딴섬, 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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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남자들]<1>가정의 외딴섬, 家長

입력 2005-08-29 03:07수정 2009-10-0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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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부장 안모(46) 씨에게 올해 8월은 유난히 힘들었다. 해외투자와 인수합병 등 회사 업무가 과중한 탓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집에서 생겼다. 업무와 무더위로 심신이 지쳐 있던 어느 날, 식탁에서 중3짜리 외동딸에게 꾸중을 했다가 집안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에게 화난 일 있어? 왜 밥상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니. 그리고 어른들 앉아 계신데 저만 밥 다 먹었다고 혼자 일어나기야?” 딸은 대답도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이어지는 아내의 말이 안 씨의 가슴을 후려쳤다. “당신, 그렇게 말해 봤자 권위 안 서요.”

아내는 작심한 듯 불만을 쏟아 냈다. 가장 스스로 가족에게 시간을 안 내주면서 딸 버릇 가르치려 하느냐, 쟤가 아빠 얼굴이나 보면서 큰 애냐, 당신은 밥상에서 분위기 띄운 적 있느냐, 쟤도 내년부터는 고등학생이라 올해가 가족과의 마지막 휴가여행일 텐데 당신은 휴가 계획도 못 세우고 있지 않느냐, 당신이 돈 버는 것 말고 가족한테 해준 게 뭐냐….

“깜짝 놀랐죠. 한번도 한눈팔지 않고 달려 왔는데, 가족들도 일에 대한 저의 헌신이 오로지 가족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 성적표는 단지 ‘돈 벌어주는 아빠’란 한 과목에서만 과락을 면했더군요. 저는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가족들은 저와 다른 집 가장을 여러 면에서 비교하고 있더군요. 주말마다 함께 여행 가는 아빠, 방학 때마다 해외연수 보내 주는 아빠, 퇴근 후 함께 산책하는 남편….”

그러나 안 씨는 이제 와서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다. 컴퓨터와 영어 실력으로 무장한 후배들이 밀고 올라오는 가운데 ‘시간과 노력을 100% 바치는 것’ 외에는 일터의 경쟁에서 당해 낼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몸 바쳐 돈을 버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쌓인 가족의 불만 앞에서 당황하는 안 씨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의 가장들이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채 밤낮없이 일하며 젊음을 다 보내 버린 가장들은 이제 ‘빵점 가장’으로 낙인찍힌 자신을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G사의 최모(53) 부장은 “젊음과 건강, 저 자신의 행복은 포기한 채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는데 그런 ‘희생’이 가족들에겐 제가 기대했던 만큼의 행복으로 다가가지 못한 것 같아 허망하다”고 말했다.

“현재의 중년 남성들이 자랄 때 아버지란 생계를 책임지고 집안의 큰일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존재였죠. 지금의 가장들은 자기가 보고 자란 역할 모델을 충실히 따랐지만, 가족과 세상은 여기에 덧붙여 ‘시간을 내주는 아빠’ ‘대화하는 아빠’ 등 다양한 역할을 원하고 있습니다.”(강학중·姜호中 경희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생계 해결’이 최우선 과제였던 1960, 70년대를 지나 자녀교육, 재테크, 참살이(웰빙) 문화 등이 가정의 우선순위 과제가 되면서 소득 활동이라는 ‘가정의 기본 업무’를 담당해 온 가장의 결정권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많은 남성은 ‘Something(대단한 무엇)’에서 ‘nothing(별것 아닌 것)’으로 오그라든 자신의 위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채 문화적 충격 속에 괴로워하고 있다.

중년 남성의 애환을 조각작품으로 형상화한 구본주(2003년 9월 타계) 씨의 ‘배대리의 여백’(1993년).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달려왔다고 자부했지만, 시나브로 ‘외딴섬’이 돼버린 이 시대 가장들의 쓸쓸함이 배어 나온다. 사진 제공 사비나미술관

건축공무원 김모(46) 씨는 수년 전부터 집안에서 주눅 든 채 생활하고 있다. 서울 강북의 아파트에 살았던 2000년 초에 부인은 “빚을 내서라도 강남의 대치동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씨는 ‘건축 규제가 어떻고, 건설 동향이 어떻고’ 하며 부인의 말을 무시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대치동 아파트 시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뒤 자연스럽게 집안의 모든 결정권은 부인에게 넘어갔다.

“저도 건축 관련 업무를 해 왔지만, 일에 쫓기다 보면 실제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젬병이기 십상입니다. 아이들 학부모회나 주부들 입소문을 통해 전파된 ‘아줌마 정보’가 훨씬 현실적이고 미래를 내다봤던 거죠.”

은행원인 장모(47) 씨는 최근 경기 구리시에서 서울 영등포구로 이동 발령을 받았다.

“자가운전으로 출퇴근하느라 매일 두 시간 이상씩 길에서 허비합니다. 아내가 구리시의 집 근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 신경 쓰며 일까지 하려면 제가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영등포구로 이사하자는 제안도 해보았지만 “한창 공부하는 아이들을 전학시키려고 하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가정에서의 소외감 때문에 일탈하는 남성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회사원 한모(42) 씨는 최근 직장 동료와 바람피우면서 여관비 등을 신용카드로 계산하고 휴대전화 통화 기록도 지우지 않았다. 당연히 부인에게 들켰다.

한 씨를 심리상담 했던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뒤늦게 경제활동에 나선 부인의 수입이 남편보다 많았으며 빨래나 식사 준비 등을 주로 남편이 했는데, 부인이 가끔 남편에게 모멸감을 주는 발언을 했다”며 “한 씨가 바람피운 동기엔 부인에게 ‘한 방 먹이려는 심리’가 컸고 그래서 차라리 ‘사고를 친 게’ 발각됐으면 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채기(鄭菜基) 한국남성학연구회장은 “남성의 소외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이 전체적으로 변하는 물결의 일환”이라며 “가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립된 벽에 갇히지 말고 서로의 고민과 불만, 집안일까지 적극적으로 털어놓고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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