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886년 이화학당 설립

  • 입력 2005년 5월 31일 03시 17분


코멘트
추위도 한풀 꺾인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태평양 우편선 아라빅호에는 단아하지만 의지가 굳세 보이는 초로의 미국인 부인이 타고 있었다.

마흔에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다 마침내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해외 선교사업을 위해 쉰셋의 나이에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을 향해 장도에 오른 스크랜턴 부인이었다. 오랜 여행 끝에 그녀는 의사인 아들 내외, 통역자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당시 외국 공관과 선교사들의 근거지인 조선 땅 정동에 정착한다.

‘이 나라 여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하다 우선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000여 평을 샀다. 10월 9일 밤 손자가 태어났다. 너무 추워 아기를 밤새 안고 재우다 한국의 어머니들과 아기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엇보다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이화 70년사)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은 스크랜턴 부인의 첫 난관은 학생 구하기였다. ‘양도깨비’에게 선뜻 딸을 내 줄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1886년 5월 31일 고관 소실인 김 부인이라는 여인이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왔다. 이날이 바로 이화학당 창립일이다. 학생 한 명만을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이뤄졌다.

한 달 뒤 가난 때문에 딸을 부양할 수 없다며 한 엄마가 열 살 난 꽃님이를 데려왔고 몇 달 뒤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네 살 난 별단이도 합류했다. 11월, 학수고대하던 200평 규모 한식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공되고 이듬해 2월 고종황제가 학당을 가상히 여겨 ‘梨花(이화)’라는 교명과 이를 새긴 편액을 내리면서 명실상부한 여성 교육의 산실이 된다.

학생이 꾸준히 늘자 1891년에는 기와집 교사를 헐고 붉은 벽돌로 2층 건물을 세웠다. 건물은 곧 장안의 명물로 부녀자들의 인기 나들이 장소가 됐다. 성경과 가사 자수 음악을 가르치다 1889년 최초의 한국인 교사 이경숙의 채용을 계기로 한글과 한문 교육이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학제도 미비해 대개 8, 9세에 입학해 한 1년 공부하다 시집가는 게 관례였다. 결혼이 곧 졸업이었던 셈이다.

이화는 1906년까지 50여 명의 신여성을 배출했다. 이 중 약 30%가 교육 종교 의료분야에서 활약하며 불합리한 제도와 인습 및 이로 인한 무지 속에서 잠자던 한국 여성들을 역사의 한복판으로 이끌어 내는 전위대 역할을 했다. 119년 전 정동 한옥 한 구석방에서 싹이 튼 소박한 꿈이 오늘날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로 성장한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