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춘하추동’… 나혜석, 그녀가 현대를 산다면…

  • 입력 2004년 12월 17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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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함정임 지음/220쪽·9000원·민음사

‘여성의 자의식’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강점기 서양화가이자 소설가였던 나혜석은 매력적인 캐릭터다. 남자들도 살기 어려웠을 1920∼30년대에 여자로 태어나 유부남이든 천도교 교령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연애했다. 게다가 외교관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였고 그 숨 막히도록 갑갑한 시대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림’과 ‘글’을 통해 확고한 자기 세계를 만들었던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 속에서는 아내와 어머니로서, 제도 바깥에서는 자유연애와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넘나들던 그녀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혹독했다. 세상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했고 마침내 차가운 외면으로 응수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년에 이르러 돌보지 못한 자녀들에 대한 회한을 품고 양로원을 전전하다 행려병자로 숨졌다.

여성에게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도덕과 인습을 강렬한 어조로 비판한 ‘이혼 고백장’과 불륜 상대였던 남자를 상대로 ‘정조 유린죄’라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당시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던 나혜석.


이 겁 없던 여자의 삶은 아직도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억압과 답답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존재하는 이 땅에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는 신화다.

소설가 함정임 씨(40)가 펴낸 소설 ‘춘하추동’은 나혜석의 삶을 토대로 한 장편소설이다. 이미 서양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평전을 번역하고 미술 에세이집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을 펴낸 바 있는 작가가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단순히 고인의 삶을 다룬 평전을 쓴 게 아니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삶을 추적하는 한 30대 여성 다큐멘터리 작가 ‘가은’의 눈을 통해 죽은 나혜석을 코드로 살아있는 현대 여성의 의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나혜석이 느꼈던 ‘억압’에 집중하기보다 ‘생의 8할을 예술과 사랑’에 쏟았던 그녀의 무모했던 삶이 현대를 살고 있는 자유로운 여성 작가의 생에 어떻게 녹아들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가은’도 유부남 사진작가를 애인으로 둔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삶을 갈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던 시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 예술가로 당당하게 살았던 나혜석을 안타까움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소설은 결국, “매번 사랑을 쓰는 일은, 매번 사랑을 하는 일만큼이나 설레고 황홀하고 곤란하고, 그리고 피로한 일”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억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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