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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⑦인공을 인정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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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⑦인공을 인정해야 했을까

입력 2004-10-03 18:14수정 2009-10-0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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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1945년 8월 말 서울 YMCA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이 사진은 손치웅씨가 최근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에 기증한 것이다.

《광복된 지 갓 3주를 넘긴 1945년 9월 6일 경기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현 헌법재판소 자리)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임시의장 여운형의 사회로 열린 이날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됐다. 해방공간에서 이를 흔히 ‘인공’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틀 뒤인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남조선 미군정청’을 세우고, 당분간 남한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임을 천명했다. 그 외의 정부는 일절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미군정은 당연히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비롯한 국내 보수세력 역시 인공을 부인했다. 결국 인공은 조선인민당으로 간판을 바꿨다. 그 뒤 남한의 좌익세력은 미군정과 보수세력을 비난했다.

인공을 정부로 승인했다면 한반도는 광복 직후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궁극적으로 분단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민족적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남한 학계 일각에 비슷한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과연 그랬을까? 인공 수립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같은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해 보자.》

● 인공의 뿌리 건준과 공산당의 침투

1945년 8월 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건준에 들어오자 안재홍(사진)을 비롯한 중도파마저 건준을 떠났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인공의 뿌리는 광복 이튿날인 8월 16일 출범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여운형은 사전에 일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재정권 등 행정권 일부를 넘겨받아 그것을 근거로 건준을 전격 발족시켰다. 1944년 여운형 자신이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이 건준의 모체가 됐다.

건준은 초기에는 좌파와 중도파를 아우르고 부분적으로 우파도 참여토록 했다. 민족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남북한 양쪽에 건준 지부 또는 지역 건준이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됨으로써 건준은 단시간에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8월 하순부터 건준의 세력판도가 급변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침투해 들어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안재홍으로 대표되던 중도파가 이탈하고 많지 않던 보수파도 이탈했다. 여운형은 좌익계 변호사 허헌을 부위원장으로 영입해 조직 강화에 힘썼으나, 이 과정에서 오히려 좌파의 발언권만 더욱 커졌다. 그때 이미 건준은 좌우연합적인 성격을 상실했다.

● 인공의 정체와 정치적 계산

그런데도 여운형은 미군의 남한 상륙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남한에 한국인들의 정부가 세워져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미군이 이 정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인공 수립을 선포한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 정체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1300여명에 이르는 인민대표자들은 이름에 걸맞은 절차를 거쳐 선출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회 개최날짜와 개최장소 및 의제도 미리 공표되지 않았다. 즉, 인민대표자를 뽑는 선거도 없었고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대회가 열리는지조차 대다수 ‘인민대중’은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인민대표자니 전국인민대표자대회니 하고 표방하는 것부터가 부적절했다. 대표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위 인민대표자든 전국인민대표자대회든 정부 수립과 같은 민족적 대사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선포할 권한이나 자격은 애당초 없었다고 봐야 옳다.

● “공산당이 꾸며낸 소아병적인 연극”

여운형의 친동생으로 당시 상황에 밝았던 여운홍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인공의 성립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고 회고했다. 여운형도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소집과 인공의 수립이 혁명적 조치였음을 사실상 자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이 대회에서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연설했다.

인공의 또 하나 문제는 지도부 구성이 자의적이었다는 점이다. 중앙정부 주석에 이승만, 내무부장에 김구, 외무부장에 김규식, 군사부장에 김원봉을 선출했으나 당시 해외에 머물던 그들과 아무 교감도 없었다. 북한에 있던 조만식과도 협의 없이 그를 재무부장으로 발표했다. 심지어 서울에 있던 김병로나 김성수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사법부장과 문교부장으로 이름이 올랐다. 이런 식으로 당사자들과 상의 없이 각료 명단을 멋대로 작성해 벽보를 붙였기에 ‘벽보내각’이란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인공은 위상 제고에 급급해 국내외 명망가들의 이름만 빌렸다고 할 수 있다. 결과는 우스꽝스러웠다. 인공이 일방적으로 각료 명단에 포함시킨 사람들 거의 모두가 참여를 거부했던 것이다. 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부터가 인공을 외면했다. 1945년 10월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인공측이 찾아와 주석 취임을 간청했지만 깨끗이 거절했다.

● 여운형 몸수색까지 한 임정요인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요인들의 반응은 더욱 냉담했다. 적대적이기도 했다. 1945년 11월 귀국한 그들은 임정이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정부를 또 만들었느냐고 인공측을 힐난했다. 그들은 집무실이자 거처인 경교장으로 여운형이 찾아왔을 때도 노골적인 박대를 했다. 여운형을 몸수색까지 하면서 쫓아내다시피 한 것이다.

인공은 이처럼 민족내부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의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됐다. 당시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총영사 알렉산드르 폴리안스키는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 정부를 어느 누구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소련총영사관의 도서실장 샤브시나는 “인공은 조선혁명의 토대가 북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모스크바의 매체들도 인공을 무시하는 소련 정부의 입장을 반영해 인공에 대한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평양에 주둔한 소련점령군 사령부의 입장은 훨씬 부정적이었다. 정치공작담당인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령은 1945년 9월 하순 인공의 각료들을 분석하면서 이승만을 ‘친미반소(親美反蘇)의 대표적 반동’으로, 김구를 ‘중국 국민당의 앞잡이이자 반소적 인물’로 규정했다.

● 소련마저 인공을 철저히 무시했다

메클레르는 인공의 부주석과 총리로 각각 발표된 여운형과 허헌에 대해서도 ‘일제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친일분자’로 매도했다. 그리고 그는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인공에 대해 ‘반소적 친미적 친일적 반동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45년 10월 13일 소련점령군의 감독 아래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 열성자대회’가 북한에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을 창설하기로 결의하면서 그 결정서에 인공을 부정하는 조항을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그해 11월 15일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인공을 몇몇 사람들이 골방에 모여 만든 것이라고 혹평하면서 “우리는 누구도 이것을 정부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인공에 대한 민족내부의 반응 및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종합해 볼 때 인공은 처음부터 좌우와 남북을 아우르는 중앙정부가 될 수 없었다. 인공을 승인하지 않아 한반도가 분단되고 말았다는 주장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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