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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장하준/'선진국 벤치마킹' 제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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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장하준/'선진국 벤치마킹' 제대로 하자

입력 2004-01-27 19:51수정 2009-10-10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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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약소국으로 살아 온 우리나라는 선진국을 모범으로 삼아 그를 배우려는 소위 ‘벤치마킹’에 능하다. 이러한 경향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존 경제체제에 대해 국내외에서 거센 비판이 일면서 더 강해졌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하는 것을 사대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발전하는 데 공헌한 점이 많다. 문제는 모범으로 삼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벤치마킹이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美 경제도 자유방임 아니다 ▼

흔히 개방과 자유방임의 모범으로 얘기되는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은 개방경제를 통해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등 영국 경제학자들의 자유무역 이론에 대응해 유치산업 보호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미국은 183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 때까지 1세기 이상 세계 최고의 공산품 관세율을 유지하면서 영국 등 선진국에 대항해 자국산업을 육성했다. 은행업 해운업 등 전략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도 엄격히 규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의 경제가 되면서 무역을 자유화했지만, 아직도 농업에 대해서는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제조업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는 덤핑을 구실로 수입을 규제한다.

미국에는 산업정책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미국정부는 연구개발 지원을 통해 산업발전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총 연구개발비 투자에서 차지하는 정부 비율이 20%가 안 되는데, 미국의 경우는 이 비율이 50∼70%다.

미국정부는 필요하면 시장에 적극 개입한다. 일본이 1990년대 초 시장원리를 따른다며 부실 금융기관에 공적자금 투입을 꺼리다가 경제에 멍이 든 데 반해, 미국은 1980년대 후반 저축대부조합(Savings & Loans)의 부실로 비슷한 문제에 처했을 때 국내총생산의 3%에 해당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조속히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 좋은 예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에서 진짜로 벤치마킹해야 할 것은 개방과 자유방임이 아니라, 경제민족주의와 정부의 시장개입에 대한 유연성이다.

요즘 흔히 세계화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는 싱가포르나 핀란드의 경우도 제대로 된 이해가 없다는 점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다.

싱가포르 하면 시장개방과 외국자본의 적극 유치라는 면만 강조되지만 싱가포르는 토지가 대부분 국유화돼 있고, 많은 주택이 공공임대주택이며 주요 기업들은 대부분 국영이다. 싱가포르를 벤치마킹하자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토지와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지지할까.

핀란드의 경우도 비슷하다. 노조 조직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노동시장 규제도 엄격하다. 복지가 발달해 세금도 많다. 또 1930년대부터 1993년 유럽연합(EU) 가입 때까지 외국인 지분이 20% 이상인 모든 기업을 공식적으로 ‘위험기업’으로 분류해 특별관리했고, 지금도 투자청 웹사이트를 보면 ‘우리는 절대 국내기업보다 외국기업을 우대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말하는 나라다. 국영기업 비중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노동시장 규제완화, 세금 감면, 외국인 투자자 우대, 민영화 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개방론자들이 핀란드를 제대로 알면 과연 그 나라를 벤치마킹하자는 소리가 나올까.

▼개방충격 흡수장치 마련을 ▼

싱가포르나 핀란드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개방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개방을 하기 위해서는 개방의 충격을 흡수하고 그 희생자들을 구제해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이 복지국가, 토지 국유화, 공기업, 노동시장 규제, 외국인투자 규제 등의 ‘반(反)시장적’ 수단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배우려면 제대로 알고 배워야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우선 손에 닿는 것만 가지고 벤치마킹을 해서는 안 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교수·고려대 BK21 교환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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