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김형태 시청자센터 주간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 전문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6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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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김형태 시청자센터 주간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 전문◆

#예견된 정연주 사장의 파행

정연주 KBS 사장이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를 받는 자리에서 KBS가 친북활동 혐의가 있는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대해 사과했다. 2003년 10월 2일 KBS에서 열린 국감 자리에서이었다.

"시청자들에게 오해와 혼란을 준 점에 대해 사과합니다... 앞으로 논란이 있는 문제를 다룰 때는 더욱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법원의 판결을 믿은 제작진의 판단을 존중해 방송을 결정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송 씨를 미화하는 듯한 프로가 방송된 데 대해 사과 드립니다..."

정연주 사장은 이 같은 사과를 한 것 외에도 자신의 간첩 연루설이 불거져 곤혹을 치렀다. '간첩혐의로 체포된 사람이 교도소 밖으로 밀반출하려던 쪽지에 정 사장이 간첩활동을 함께 한 인물로 거론됐다'고 한 야당의원이 폭로했다. 정 사장은 '그 쪽지에 자신의 이름이 거명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왜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올랐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우리 수사기관이 지금까지 나를 그냥 두었겠느냐'고 항변했다.

KBS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는지 한탄스럽기가 이를 데 없다. 전례없는 프로그램에 대한 사과에다 사장 신분에 대한 의혹까지 겹치니 평생을 KBS에 몸담아 온 KBS맨의 한 사람으로 심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신문의 논설주간이던 정연주 씨가 KBS 사장으로 취임해 온 것은 지난 4월 말로 5개월 여 전이다. 서동구 씨가 사장취임 9일 만에 물러나고 난 직후이었다. 나는 그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사장으로 취임했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내심으로 그의 사장취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노무현과 매우 가까운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만난 언론인이 바로 그이었다. 노 당선자가 정 주간을 만나기 위해 한겨레신문사를 직접 찾아갔던 것이다. 당시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하는 장면이 크게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 된 노무현이 회사로 직접 찾아갈 정도로 정연주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칼럼을 애독하면서 부터로 알려졌다. 둘의 사이가 이럴진대 그가 KBS 사장으로 왔을 때 KBS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정연주 씨가 불과 열흘도 못돼 밀려난 서동구 씨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또 그는 방송을 모르는 신문기자 출신이 아닌가.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를 KBS의 사장 부적격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뒤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KBS 사장으로 취임해 왔다. 2003년 4월 28일이었다. 취임식 다음날인 4월 29일 오전 70여명의 간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와 나는 한 바탕 논쟁을 벌였다.

"저는 어제 취임식에서 행한 사장님의 취임사에 매우 실망했습니다. 인사를 함에 있어 어떻게 노조와 상의를 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인사와 관련한 상의는 노조가 아닌 본부장 등의 간부와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확대간부회의에서이었다. 그는 개선장군처럼 회의를 진행하면서 새로 사장으로 취임한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KBS의 고위간부 70여명이 참석한 자리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부사장이 한 간부를 가르키면서 한 마디 하라고 권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그 간부는 마지못해 한 마디 했다. 어제 취임사에서 사장이 '무능력자나 비리연루자를 퇴출시킨다'고 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했다. 사장은 '나이순으로 퇴출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말라'고 간단히 답하면서 그 간부를 얼렀다. 부사장은 또 다시 질문하라고 간부들을 채근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손을 들면서 일어났다. 어제 그의 취임사를 들으면서 느꼈던 모욕감이 다시 떠올랐다. '나도 기자이고 사장도 기자이니 기자 선후배끼리 못할 말이 무엇 있겠느냐'며 나는 먼저 노조와 상의하겠다고 한 인사문제를 끄집어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감사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속사포식으로 쏟아놓는 나의 질문이 계속되자 그는 나의 질문을 일일이 메모를 했다.

"감사를 철저히 해 부정 비리를 뿌리뽑겠다고 하셨는데, 우리 KBS를 그렇게 부패한 집단으로 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KBS는 의사결정이 늦어 비능률적이어서 시대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한 감사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일할 분위기를 해칠 것이 분명합니다. 일하다 다칠 필요가 뭐 있나하는 분위기가 생길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은 아셔야 합니다. 우리 KBS는 지난해 감사원 감사에서 한 건의 지적도 받지 않은 우수 기관이었습니다."

나는 내친 김에 어제 그의 취임사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던 부분들을 모두 얘기해야겠다고 작심하고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비리 연루자나 무능력자는 퇴출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퇴출 돼야할 사람은 퇴출 돼야지요. 그렇지만 우리 KBS 직원들은 법으로 신분보장이 돼 있습니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마음대로 퇴출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일반 기업과는 다릅니다. 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언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장님의 퇴출의지가 자칫 자의(恣意)적으로 행사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와 나와의 거리는 불과 7,8미터밖에 안 되었다. 예상외의 질타성 질문이 쏟아지자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제, 취임식에서 우리는 KBS 사가(社歌)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나라에는 애국가가 있고 회사에는 사가가 있습니다. 저는 KBS에서 25년 기자로 일하면서 회사 행사 때마다 부르는 사가를 통해 애사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동료들과의 우의를 다져왔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왜 누가 무슨 이유로 사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는지 저로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은 지금까지의 KBS를 부정하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확대간부회의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이 밖에도 '접대 골프 치지 말라' '촌지 받지 말라'고 하는 등 대한민국 기간방송사 사장의 것치고는 품위가 현격히 떨어진 그의 취임사 내용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나의 일방적 질문은 15분 정도 계속되었다 한다. 나의 질문에 사장은 자신이 '잘못 인식한 부분이 있다면 유감스럽지만 KBS가 나아 가야할 방향은 공익성을 높여 시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등 취임사 전반에 대한 자신의 원래 의도를 설명하고 난 뒤 나의 질문 하나 하나에 나름대로 성실하게 답변했다.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성의를 다해 답해 주었다.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자 한 간부가 더 고약한 질문을 했다.

"사장님의 의식과 사상에 대해 의혹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마디로 지나친 친북 성향이거나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직원들이 앞으로 사장님의 코드에 맞춰야 합니까?"

그는 'KBS의 사원들이 나의 코드에 맞출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그는 '집단의 지혜와 상식으로 KBS가 움직이면 된다'고 말하면서 '나는 KBS 직원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취임사에서 KBS 임직원을 향해 사장이 '동지 여러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하는 추궁식의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정 사장은 '70년 대 학생운동시부터 습관적으로 써오던 동지란 말을 친근감 있게 말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해명했다.

# 섣부른 개혁이 KBS 망친다

KBS 정연주 사장은 2003년 4월 29일 오후 2시 KBS 출입기자들과 첫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오전에 확대간부회의석상에서 있었던 간부들과의 토론(?)이 마음에 걸린 듯 기자들에게 그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KBS 간부들이 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으며 나의 취임사에 신랄한 비판을 했다'고 밝혔다. 그 당시 신문 보도의 전문을 여기 옮긴다.

[정연주 KBS 사장은 29일 출입기자 간담회를 열어 '프로그램의 공익성을 높인 다음에야 수신료 인상을 말할 수 있다'며 당분간 수신료 인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 사장은 이날 '주말이면 이 채널도 강호동, 저 채널에서도 강호동이 나오고, 연예인 일색 상태에서 어떻게 수신료를 올려 달라고 하겠느냐'면서 '지금 수신료가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데, 먼저 공익적 프로그램을 많이 방송하고 나서 수신료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KBS 프로그램은 시청률 잣대로 보지말고 공익성 잣대로 봐달라'며 '시청률 경쟁에서 뒤지더라도 방송풍토를 바꾸는 데 KBS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오늘 오전 국.실장 상견례 자리에서 전날 취임사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취임사에 대해 우려와 걱정, 충격, 불안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시스템을 좀 생기 있게(vitalize) 만들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간부들로부터 비판받은 취임사 내용으로 '동지'란 표현, '젊은 KBS'와 '노조와의 협력'을 강조한 것, '부정에 연루된 사람은 KBS를 떠나라'고 한 것 등을 소개했다.

그는 취임사에 이어 이날도 <제대로 된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 '프로그램의 특정한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토론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은 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또 '인사 문제를 노조와 협의하겠다'는 취임사 내용과 관련, '이 문제를 간부들부터 신랄하게 비판받았다'면서 '그러나 다면평가를 노조와 협의해야 하는 것은 KBS노사협의사항' 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3년 4월 30일 기사)

정연주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부사장과 본부장, 센터장 등 10여명의 KBS 최고위 간부 전원을 경질했다. 그는 재신임을 받지 못하고 떠나가는 몇몇 본부장과 센터장으로부터 항의성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떠나가는 간부들로부터 비난받은 것은 기존 질서의 무시, 독단적인 인사, 노조와 긴밀한 연계 등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와서 처음으로 단행한 인사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스스로는 '개혁적'이라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차라리 '혁명'에 가까웠다. 이제 겨우 부장인 사람을 3단계, 4단계 뛰어 넘어 센터장이나 본부장으로 승진시키려고 했거나 실제로 승진시키는 등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 인사를 단행했다. 몇 단계 아랫사람이 갑자기 상급자가 되는 웃지 못할 일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갓 부장이 된 사람을 국장으로 무리하게 승진시키다보니 특별인사위원회를 열어 이를 추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어제까지 부하직원으로 그를 데리고 있던 고참 부장이나 주간은 하루아침에 오히려 그의 부하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장급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이었다. 부장이던 사람이 센터장 등의 고위간부가 돼 자신의 위로 온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2,30년을 방송 외길을 달려온 수많은 간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비개혁적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이렇게 발령이 난 사람의 수가 무려 50명이 넘었다. 이들 대부분은 허울 좋은 '전문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나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제작현장에서는 인력이 부족해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해 일을 하고 있는 판에 수십 년 노하우를 쌓은 고급인력을 비개혁적이라는 해괴망측한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았으니 어찌 이런 인사를 온당하다 할 수 있겠는가.

본부장으로 내정된 사람 가운데 두 명이 지나친 벼락 승진에 놀라(?) 그 직을 사양한 일이 벌어졌다. 본부장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의 꿈은 참모총장이고 사법시험 합격해 검사가 된 사람의 희망은 검찰총장이듯이 기자가 평생을 열심히 일해 마지막으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자리가 바로 보도본부장이다. PD는 제작본부장이나 편성본부장을 노린다. 그런데 두 사람이나 그런 본부장 자리를 사양한 이유가 무얼까? 한 마디로 자기를 그렇게 발탁 승진한 인사가 온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장이 취임하고 한 달쯤 된 5월 말 수원센터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KBS 부장급 이상의 간부 대토론회가 열렸다. 신임 정 사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밤 12시 넘어 까지 KBS 전반에 관한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다. 인사문제가 나왔다. 정 사장 취임 직후의 인사에서 전문위원으로 발령난 간부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한꺼번에 밀려난 간부 50여명에 대한 활용계획에 대해 한 고위간부가 설명했다.

"개혁인사로 회사에 활기가 돌고 있습니다. 위원으로 발령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수원 교수나 현업배치를 통해 유휴인력을 최소화 할 계획입니다. 또 이들을 상대로 재교육을 철저히 시킴으로써 퇴직 후의 일자리 마련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원'이라는 자리가 물먹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 가고싶은 자리로 만들어 나아가겠습니다..."

나는 고위간부의 이 같은 사태인식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활기가 돌아? 일할 기회를 빼앗아 놓고 '위원'을 누구나 하고 싶어하도록 하겠다고?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태를 어떻게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활기가 도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가 무너져 우리 회사는 지금 한 마디로 아래위가 없어졌습니다. 계급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납득하지 못할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사는 자고로 예측 가능해야 하는 법입니다. 인사는 '대략 어떤 인물이 어느 자리에 갈 것이다'라고 하는 대체적인 컨센서스(consensus)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측할 수 없는 인사는 인사권자의 횡포나 전횡일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개혁'이 도대체 뭡니까? 노조출신이나 협회출신 직원들은 개혁적이고, 노조나 협회 따위의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방송현업에서 성실하게 묵묵히 일해온 사람들은 비개혁적입니까? 도대체 저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사장님은 인사문제를 노조와 상의하겠다고 한데다 부사장님은 노조위원장 출신이니 우리 간부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간부들까지도 회사일 보다는 노조나 협회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고위간부는 나의 발언이 강경해지자 말을 중단시키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 했다. 이에 일부 간부들이 나서 항의를 하기도 했다. 실망스러운 KBS에다 한심한 간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고위 간부로 선임됐으니 그들이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한 인사를 알만하지 않는가.

KBS가 도대체 왜 이 모양이 됐는가?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긍정적인 평가를 할만한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권위적인 분위기가 사라진데다 사장 등 고위간부 결재 받기가 쉬워져 업무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 등은 평가할만하다. 여기에다 토론문화의 확산으로 상하의 언로가 트인 것도 발전으로 손꼽을만하다. 그러나 이 같은 발전과 긍정적인 측면에도 KBS가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전의 KBS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위계질서가 무너진데다 새 사장이 '개혁'과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방송현업자에게 지나친 재량권을 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섣부른 개혁이 KBS를 망치고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부장이나 국장의 데스크 기능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사정, 앞 뒤 구분을 파악하는 데 상대적으로 사려 깊지 않은 젊은 제작자들이 만든 프로그램이 상급자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방송되는 상황이니 어찌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여기에다 사장의 진보적인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충우돌의 프로그램은 왜 그다지도 많은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다. 인민재판을 할 의향인지 남의 집 대문 앞에 중계차를 세워 놓고 '나와라' 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니 이 어이 욕먹지 않겠는가. 또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자기 구린 줄 모르고 남의 흠만 잡아 타언론을 나무라니 누가 KBS를 곱게 보겠는가.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너무 이름에도 민감한 특정 사안에 대해 '역사'라는 이름으로 이러쿵저러쿵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니 누가 공정하다 하겠는가. 한 마디로 품위가 없어졌다 하지 않을 수 없다. KBS 프로그램이 저급해졌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KBS는 국가 기간방송이다. KBS는 다른 민방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 늦더라도 믿을만한 소식을 전해야 하며 개혁적이 아닐지라도 보편 타당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국민들이 KBS 프로그램을 보고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KBS 프로그램은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확정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검증된 일을 심층적으로 다뤄 국민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야한다. 오늘의 KBS를 보면서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간섭이 적어진 상황에서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데도 KBS가 스스로 망가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수신료 인상 계획, 도로 아미타불

KBS 게시판에 연일 시청자들의 항의와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국민의 방송 KBS가 국민을 기만했다' '노무현의 코드 방송 KBS는 각성하라' '간첩 혐의자를 두둔하는 데 내 돈이 쓰였다니...' '더 이상 수신료를 낼 수 없다' 등 불만의 소리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 시청자들의 주장이 다 맞지는 않다. 상당부분 잘못 알고 공격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나는 보도본부 사회1부장에서 국장급으로 승진해 1년 전쯤에 시청자센터로 왔다. 시청자센터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각종 대시청자 서비스 업무와 KBS 대외사업, 시청자 위원회와 시청자 참여프로그램 관리, 그리고 교향악단과 관현악단을 관리 운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나의 임무는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를 제고해 KBS의 이미지를 드높이는 것이다. 국민들이 KBS를 명실공히 국민의 방송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로부터 사랑 받는 KBS를 만드는 것이 나의 주된 임무이다

그런데 시청자센터의 노력 모두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다. 수신료 납부거부 움직임이 일고 있는 데다 '송두율 관련 프로그램 파문' 등으로 KBS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KBS는 사실, 시청자센터가 중심이 돼 2004년을 잠정적으로 수신료 인상의 해로 정하고 분위기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신료는 월 2500원이다.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세계 최저 수신료이다. 1981년도에 책정된 것으로 2003년 현재 기준으로 무려 22년 그대로이다. 대한민국에서 20여 년 동안 오르지 않은 유일한 공공요금이다. 영국이나 일본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수신료 마저 이제 아예 안 내겠다니 안타깝다.

수신료는 전파를 수신하는 데 대한 대가이다. 전파의 소유자는 국가이다. 그래서 수신료는 원래 국가가 전파 수신자로부터 받아야하는 돈이다. 그런데 KBS가 대신 받고 있다. 그것은 정부투자 기관인 KBS가 국가로부터 국가예산을 받아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국가가 거두어야할 수신료를 대신 받아 이 돈을 운영자금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신료는 KBS를 보든 안 보든 내야하는 돈이다.

시청자센터는 얼마 전 견학홀을 대폭 뜯어 고쳤다. KBS를 찾는 시청자들이 보다 편안하고 기분 좋게 KBS를 견학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년에 40만 명 정도가 찾는 견학홀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방송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을 준다. KBS는 또 KBS를 찾는 시청자들을 위해 주차장을 직원 위주에서 방문객 위주로 바꿨다. 이로써 방문객들이 KBS를 찾았다가 주차문제로 불편을 겪는 일 거의 없게 되었다. KBS홀에 장애인 통로를 만듦으로써 장애인들의 공연장 입장을 용이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교향악단과 관현악단의 지방 순회 공연을 활성화하고 특정집단을 찾아가는 공연을 함으로써 사랑 받는 KBS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주최' '후원' 등의 이름으로 각종 문화 사업에 적극 나섬으로써 예술과 문화 창달에도 힘을 썼다. 시민단체와 방송학자 등과의 접촉도 부단히 했다. 수신료 인상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조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 모두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다. 10년 공부 나무 아미타불이라고, 수신료 인상계획이 한 마디로 도로 아미타불이 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인상 계획 무산에다 수신료 거부운동까지 확산되면 안 그래도 어려운 KBS는 더 어렵게 될 것이다. 'KBS는 수신료로 운영되고 있다'라고 하지만 엄격히 이야기한다면 이건 딱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KBS의 경상경비 가운데 수신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40%도 채 안 되기 때문이다. 수신료가 터무니없이 싸다보니 그렇다. 그래서 60% 이상은 광고 등에 의존한다. 매우 잘못된 재무 구조가 아닐 수 없다. 공영방송이면서 광고수입을 주재원으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TV 수신료는 한국전력 전기료 고지서에 함께 부과되고 있다. 수신료 납부 거부 움직임과 함께 수신료의 전기료 고지서와의 분리 요구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수신료가 제대로 거두어 지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상황은 뻔하다. 방송국 문을 닫을 수 없으니 KBS는 광고를 지금보다 더하게 될 것이다. 들어가는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광고를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지막까지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사태는 KBS 입장에서 보아도 불행한 일이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신료 납부 거부 움직임과 함께 KBS 임직원의 임금이 일반 직장의 그것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게 아니냐는 비난도 일고 있다. KBS의 임금이 일반인보다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종의 일을 하고 있는 타 언론사에 비하면 오히려 적은 편이다. SBS와 MBC에 비하면 80%에서 90%수준에 불과하다. 국민들로부터 직접 수신료를 받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KBS 임직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에도 대놓고 불만을 이야기 할 수 없는 형편이다.

KBS는 1980년 대 거센 시청료 거부운동에 부딪힌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그 때는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옹호만 하는 방송을 하다 그런 치욕을 겪었다. 이번 상황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어설픈 개혁과 자율이 가져온 시행착오가 이런 사태를 자초했다고 봐야한다. KBS인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이다. KBS인들의 노력과 자중자애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2003년 10월)

#옹졸한 KBS 최고위 간부들

"부사장님, 저는 시청자 센터의 선임 주간(국장)으로서 센터장의 부재시 센터장의 업무를 대행하게 돼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센터장 대행으로 만들어 회의를 저 대신 참석하게 합니까? 오늘이 벌써 3일쨉니다."

2003년 10월 9일 오전 귀빈실에서 나는 안동수 부사장에게 정중하지만 엄중하게 따졌다. 주요간부회의가 막 진행되기 직전이었다. 시청자 센터장을 대신해 내가 회의에 참석해야 됨에도 부사장이 다른 사람을 회의에 참석하게 한 데 대해 항의를 한 것이다. 7-8명의 간부들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 주간은 곧 회사를 그만 둔다면서요? 정계에 진출한다면서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회의에 들어오게 했어요."

"제가 회사를 곧 그만 두고 안 두고는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엄연히 제가 회의에 참석하게 돼있는데 제가 회의 참석자로서 부적절한 사람이라면 저에게 한 마디라도 말씀을 하시고 사람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센터장은 정연주 사장과 함께 국제회의 참석차 사흘 전 터키로 출장을 갔다. 센터장의 부재로 센터장의 모든 권한이 선임국장인 시청자 주간에게 위임됨으로써 센터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말할 나위도 없고 임원회의나 주요부서장회의까지도 당연히 내가 센터장을 대신해 참석하게 돼있다. 그럼에도 주요부서장회의에 부사장이 나를 제외시킨 것이다. 집히는 것이 있었다. 사흘 전 있었던 임원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센터장 출장 첫 날 나는 센터장을 대신해 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한 간부의 안일한 사고와 인식에 대해 지적(?)했다.

"사장이 KBS 개혁 프로그램이 문제가 있다고 대국민 사과를 한 판국에 담당 본부장님의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게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그 날 조간신문들은 이틀 전 한 프로그램에서 '김일성 기념시계'가 방송된 데 대해 일제히 KBS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사장을 대신해 회의를 주재하던 부사장은 이 문제를 담당 본부장에게 캐물었다. 이에 대해 본부장은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신문이 딴죽을 건다'며 불만스러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문을 상대로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부사장이 '생방송'이었는지 '녹화방송'이었는지 여부를 묻자 본부장은 '녹화방송'이었다고 답했다. 이에 부사장은 '녹화방송인데 그러한 것들이 왜 걸러지지 않았나'며 아쉬워했다. 이 같은 부사장의 지적이 불만스러웠든지 본부장은 '김일성 시계를 미화한 것이 아니고 희화화, 쑈화 한 것으로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며 볼멘소리로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되는가 했는데 부사장이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했다.

"시청자센터는 요즘 어떻습니까?"

"시청자센터에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의 경우 의견제시 전화 가운데 69%가 송두율 건과 관련한 항의 전화이었습니다. 심한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만 우리 직원더러 그래도 친절하게 전화 잘 받으라고 지시해두고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우니 시청자센터에서 시청자들에게 좀 더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무슨 특별한 보고거리는 없습니까?"

"특별한 보고거리는 없습니다만 조금 전 얘기가 있었던 '김일성 시계'건과 관련해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할 얘기가 있으면 해보세요."

이렇게 해서 나는 담당 본부장의 안이한 인식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제가 본부장님의 인식이 안이하다고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사장님의 사과 이후 우리 KBS인들은 보다 겸허한 자세로 업무에 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중자애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김일성 시계' 같은 것을 방송을 한다는 것은 제작진들이 지금 우리 KBS가 처해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방송은 하지 말아야할 때가 아닙니까? 제작진의 제작의도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KBS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경솔했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지만 회의의 주제가 다른 것으로 넘어 가는 바람에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 날 임원회의는 더 이상의 논쟁 없이 끝났다.

그런데 나는 센터장 대행으로 그 회의 이후 사흘 동안 어떤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나 대신 참석케 했던 것이다. 부사장에게 회의 참석 문제로 따진 날은 목요일로, 이날은 정례적인 주요 부서장 회의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내가 센터장을 대신해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회의에 참석하려다 뒤늦게 회의 참석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나는 월요일 첫 회의 이후 그 날까지 사흘 동안 네댓 번의 회의에서 제외 당하고 있었다.

부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왜 나를 따돌렸을까? 한 마디로 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사장 취임 직후 확대간부회의석상에서 있었던 사장과의 충돌, 한 달 후 수원센터 토론장에서 벌어졌던 논쟁만으로도 눈의 가시이었는데 이번에 또 다시 쓴 소리를 함으로써 더욱 낙인찍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직언을 싫어하는 KBS의 고위간부들의 옹졸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직언을 했다가 좌천될 뻔했던 적도 있다. 5개월 전인 지난 5월 인사 때이었다. 확대간부회의에서 사장을 상대로 고언(苦言)을 퍼부었던 나는 얼마 후 있은 인사에서 무보직의 '위원'으로 밀려날 뻔했다. 새로운 사장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간부를 주요 부서에 계속 그냥 놔 둘 수 없다고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나는 다른 간부들의 충언과 만류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때가 보도국에서 시청자 센터로 온 지 불과 6달 밖에 안됐을 때이었다. '싫은 소리' 한다고 부임한 지 6개월 밖에 안 되는 사람을 좌천시키려고 한 KBS 최고위층의 옹졸함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KBS는 국가 기간방송이다. KBS는 몇 년째 영향력 1위의 언론기관으로 조사됐다.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 기관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다. 책임이 무거운 만큼 중심 또한 똑바로 잡아야 한다. 그 중심은 남이 잡아 주는 것이 아니다. KBS 맨 스스로가 잡아야 하는 것이다. KBS의 대오각성과 분발을 기대한다.

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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