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최재천/共生인간 ‘호모 심비우스’

  • 입력 2003년 3월 25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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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지도 않은 전쟁이 지구촌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다. 윗동네 큰 애들이 아랫동네로 내려와 버릇없이 구는 조무래기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것 같아 지켜보기조차 민망하다.

미국 정부의 거침없는 태도와는 달리 지난 몇 달간 내가 만난 미국인들은 한결같이 이번 전쟁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미안해한다. 물론 내가 만나는 미국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학자들과 지식인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추종하거나 그의 행위를 두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번 전쟁이 더욱 길고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이상적인 인간상 ▼

현생 인류의 학명은 알다시피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다. 현명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요사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들을 보면 결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살 집인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어리석은 동물이다. 게다가 희망을 꿈꿔야 할 21세기 벽두부터 끊임없이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걸 보면 우리는 필경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는 우매한 동물임에 틀림없다.

금년 초 나는 얼마 전 타계한 천성순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김용운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장과 함께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의 초청으로 21세기 문명 포럼에 참가했다. 그 포럼에서 나는 ‘호모심비우스(Homo symbious), 21세기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공생인(共生人), 즉 더불어 사는 인간을 이번 세기에 우리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이상으로 제안했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결전장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200여년 전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그의 ‘인구론’(1789년)에서 밝힌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다. 찰스 다윈 역시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하지만 다윈은 그 무한경쟁에서 이기는 길이 막무가내의 약육강식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지구생태계에서 합쳐 놓으면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생물군인 현화식물, 즉 꽃을 피우는 식물과 개체수가 가장 많은 생물인 곤충의 성공 비결만 보더라도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무차별 경쟁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현화식물과 곤충은 서로 돕는 공생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성공했다. 서로 물고 뜯은 게 아니라 손을 마주잡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대립과 전쟁을 넘어서 생명과 협동이 21세기 인류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국제환경학회에 가 보면 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점잖은 환경학자들이 있다. 흰개미들과 함께 소들이 뀌는 방귀 속의 메탄가스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소가 얼마나 많으면 그런 얘기가 나올까. 소들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 인간과 공생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지구 최대의 지주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벼 밀 보리 옥수수 등 이른바 곡류식물들이다. 불과 1만년 전 우리 인간이 농경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저 들판 한구석에서 말없이 피고 지던 잡초에 불과했던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결론은 역시 간단하다. 오로지 우리 인간과 공생했기 때문이다.

▼전쟁 아닌 생명의 길 찾아야 ▼

규모로 볼 때 자연계에서 우리 인간만큼 공생의 지혜를 잘 터득해 실천에 옮긴 동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현대인들은 그런 사실을 잊고 살 뿐이다. 우리는 마치 자연의 일부가 아닌 양 살고 있다. 자연은 그저 끝없이 발라먹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다. 나는 이번 세기에 인류가 그 본연의 모습, 즉 공생인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서로 물고 뜯는 것보다 더불어 사는 공생의 지혜를 다시 한번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뒤숭숭한 이 봄, 또다시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비록 총성 속에 묻힐지라도 나는 끊임없이 생명의 노래를 부르리라.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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