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방화]참사 60여명 구한 금호驛長 권춘섭씨

  • 입력 2003년 2월 19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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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영남대병원에 입원중인 철도청 직원 권춘섭씨가 19일 급박했던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대구=특별취재팀
대구 영남대병원에 입원중인 철도청 직원 권춘섭씨가 19일 급박했던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대구=특별취재팀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전동차 방화사건은 처음 화재가 일어난 1079호 전동차보다는 뒤늦게 역 구내에 들어와 정차한 1080호 전동차에서 희생자가 더 많았다.

그러나 사고 당시 1080호 전동차에 타고 있던 철도청 공무원의 침착하고 민첩한 대처로 인해 그나마 희생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북 영천시 금호읍 금호역장인 권춘섭씨(45·대구 달서구 상인동)는 19일 이 열차의 4호 객차에 타고 있었다.

1079호 전동차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 3분여 뒤인 18일 오전 9시56분경 중앙로역 구내로 진입한 1080호 전동차의 출입문이 잠시 열렸다 다시 닫혔다. 객실 방송을 통해 ‘화재가 났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연기가 객실 안으로 스며들어 호흡하기 곤란할 정도였지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권씨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문옆 의자 밑에 있는 비상 코크를 열어 놓고 문을 수동으로 열 준비를 했다. 객실 내 불이 꺼지고 비상등만 있는 상태에서 권씨는 손으로 쉽게 문을 열었다. 객실 차장으로 10년, 여객전무로 4년을 근무한 권씨는 비상시 행동요령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씨는 “전동차가 들어오는데 전광판이 퍽 소리가 나면서 터져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며 “혹시 전동차가 움직일까봐 기다리고 있다가 더 이상 기다리면 안될 것 같아 문을 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권씨가 문을 열고 나가자 객실 내에 있던 다른 승객들도 대피하기 시작했다. 당시 4호 객차에는 연기를 피해 뒤쪽의 다른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까지 몰려들어 60여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목격자들은 전하고 있다.

4호 객차에 있던 김호택씨(43)는 “일부 여성들이 휴대전화로 ‘불이 나서 나갈 수 없다’고 울먹이면서 전화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 객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부 객차는 문이 안 열려 승객들이 속수무책으로 질식사한 사실을 감안하면 생사를 가른 급박한 상황에서 권씨의 침착하고 기민한 대처가 많은 생명을 살린 셈이다.

권씨는 “비상 코크는 노약자도 쉽게 돌릴 수 있지만 정전이 된 데다 연기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어 시민들이 못 본 것 같다”며 “지하철에서 화재가 났을 때의 대처요령에 대한 홍보가 안 돼 있어 아까운 인명이 많이 희생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역 구내의 재난시설에 대해서도 “출구를 알려주는 화살표만 비상등으로 켜져 있었어도 훨씬 쉽게 대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희생자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따끔한 지적을 했다.

권씨는 전동차에서 나온 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지하철역 구내를 헤매다 연기를 많이 들이마셔 영남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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