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과잉 메시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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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해 감정 주입하는 이준익 감독 덜 말해 여백을 남기는 이스트우드

이준익 감독의 사극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 사진 제공 영화사 아침
이준익 감독의 사극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 사진 제공 영화사 아침
‘황산벌’(2003년)에서 시작해 ‘왕의 남자’(2005)를 거쳐 최근 개봉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이르기까지, 이준익 감독의 사극을 살펴보면 일관된 문제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정치를 하는 자들은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백성은 안중에도 없기에 결국 뼛속까지 고통 받는 자는 민초, 즉 우리들 자신이란 얘기다. 그래서 이 감독의 사극을 본 대중관객은 공분(公憤)의 심정을 갖게 되고, 그들은 사극 속 메시지를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정치현실에도 투영하게 된다. 바로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이 감독은 현실세계에 대해서도 비판적 발언들을 쏟아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예술적 권력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감독은 사극 속에 등장하는 무명(無名)의 병사(황산벌), 남사당패(왕의 남자), 서자(구르믈…) 같은 사회적 소수를 주요인물로 등장시킨다. 그리함으로써 관객은 힘없고 ‘빽’ 없는 영화 속 소수자들의 모습에서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이런 소수적 자아의 모습은 스스로를 ‘영화예술계의 마이너리티’로 여기면서 때론 자조하고 때론 예술적 의지를 다졌던 이 감독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감독의 사극이 갖는 코미디 코드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잉태된다. 권력을 비꼬고 신랄하게 조롱하는 한편, 낄낄거리듯 자조하는 태도를 통해 민초들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동시에 실낱같은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감독의 유머는 일견 유치하고 장난기 어린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서슬이 퍼런 현실적 발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희망과 꿈을 통해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이 감독의 생각과 주제의식에 굳이 반대하진 않는다. 무언가를 미친 듯이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예술가의 본능이며, 말할 것이 소진된 예술가는 더는 어떤 예술작품도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에는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 그것은 ‘자유’다. 예술가들은 자유를 찾아 끊임없이 위험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이기에, 예술적 자유를 얻기 위해 돈도 명예도 커리어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영혼의 순교자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감독이 최근 선보인 사극 ‘구르믈…’은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안타깝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욕이 거의 강박 수준에까지 이른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 준다. ‘견자(犬子)’라 불리는 서자는 시종 단세포처럼 행동하며 ‘난 억울해. 억울해’를 연발하면서 관객의 감정이입을 조른다. 캐릭터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갖지 못한 채 “넌 꿈이 없잖아” “당신 꿈 안엔 내가 없잖아” 하면서 연방 ‘꿈’이란 키워드만 읊어대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전복(顚覆)을 꿈꾸는 주인공 이몽학(차승원)의 연인이자 역시 사회적 소수(기생)인 백지(한지혜)가 클라이맥스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담아 던지는 결정적 대사(“꿈속에서 만나요”)가 감동적인 대신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민중의 ‘꿈’을 이야기하는 건 좋다. 하지만 꼭 ‘꿈’이란 단어를 반복하며 관객을 굳이 주입식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영화가 필요 이상 선동적이고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관객이 느끼는 심정보다 더 말하고, 더 움직이고, 더 울부짖는 이 영화의 메시지 과잉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속 맹인검객 황정학(황정민)은 인생철학을 담아 이몽학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칼잡이가 칼 뒤에 숨어 있어야지 칼 앞에 나서면 안 된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예술작품 뒤에 숨어 있어야지 작품 앞으로 나서면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올해로 80세인 미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한 해 한 해 늙어갈수록 대중으로부터 더욱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있다. 늙어갈수록 그는 영화 속에서 자기 말을 더 줄이고 더 많은 부분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말할 게 있다고 해서, 말하고 싶다고 해서 그걸 꼭 다 말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준익 감독이 예술의 궁극적인 경지를 꼭 이뤘으면 좋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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