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 일제에 맞선 두 소년, 만경암 돌담 아래 잠들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7월 20일 05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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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의 만경암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에 맞서 목숨을 바친 두 소년의 정신이 살아 숨쉰다. 멀리 보이는 팔영산의 8개 봉우리를 넘고 넘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도 했다. 고흥(전남)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의 만경암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에 맞서 목숨을 바친 두 소년의 정신이 살아 숨쉰다. 멀리 보이는 팔영산의 8개 봉우리를 넘고 넘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도 했다. 고흥(전남)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6 점암면 성기리 성주마을

오랜 세월 척박했던 땅. 그만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강하고 질긴 태도와 능력으로써만 세상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쌓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밝고 슬프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 설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쌓여 전해져오고 있다. 전남 고흥군을 다시 찾는 이유다. 지난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고흥의 이곳저곳 땅을 밟으며 다양한 이들을 만난 스포츠동아는 올해에도 그곳으로 간다. 사람들이 전하는 오랜 삶의 또렷한 흔적을 확인해가며 그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한다. 매달 두 차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나라 되찾기 위해 죽창 든 동우와 만식이
만경암 전투서 일본군 총탄에 숨 거두고
“나라가 위태로우니 싸우는 건 당연하다”
그 비장함 시퍼런데 표지판마저 사라져


설화는 수백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사실 자체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가 변질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9년 7월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의 만경암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담은 설화 ‘만경암 전투에서 핀 꽃 두 송이’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에도 기록돼 있는 이 설화는 15살의 두 소년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나라의 힘을 되찾기 위해 만경암에서 많은 의병들과 함께 일으킨 항일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나라가 없으면 어차피 우리도 없다”는 결의로 일본군의 무력에 맞섰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기록, 주민들은 그 흔적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두 소년

동우는 어디론가 떠날 채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는 만경암으로 향할 것을 짐작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니 나아가 싸우는 건 당연하다”면서도 걱정을 떨쳐내지 못한다. 동우는 어머니께 절을 올리고 집을 나선 뒤 친구 만식이와 만난다.

“동우야, 너는 안 떨려? 나는 왜 이렇게 떨리지?”

동우는 만식이의 손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나도 떨려. 하지만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하게 놔둘 순 없잖아. 우리에게도 나라를 제대로 못 지킨 잘못이 있지.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힘을 모아 잘 지키면 돼. 나는 나라를 위해 내가 뭔가 할 수 있어서 뿌듯한 마음도 있어.”

동우와 만식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윽고 도착한 만경암, 비장한 적막을 깨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일본군이 떼로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죽창을 손에 쥔 동우와 만식이는 “말로만 들었던” 총의 위력을 눈앞에서 보고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군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며 죽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을 언제까지 피할 순 없었다. 만식이는 일본군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런 만식이를 동우는 부둥켜안고 울부짖고는 친구를 위해 죽창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우도 만식이 곁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막 피어난 생의 꽃은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두려움 속에서도 몸을 내던진 소년들의 비장함은 지금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 선조의 기록을 지키지 못한 죄송스러움

동우와 만식이의 얼이 서려 있는 만경암 전투 장소는 팔영산(608m) 입구에서 약 50분 정도 올라가면 볼 수 있는 흔들바위 뒤에 있다. 사람의 손이 아닌 자연의 힘으로 다양한 크기의 돌이 담을 이뤄 쌓인 형태이다. 당시 의병들은 돌담으로 몸을 숨겼다가 일본군이 접근하면 튀어나와 공격을 했던 것이다.

고흥문화원 송호철(47) 향토사 연구위원 은 “팔영산은 고흥에서 가장 높고 겹산(여러 겹으로 된 산)이어서 토굴도 많아 피난처로도 좋다. 또 산세가 험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만경암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르고 거의 돌로 이뤄져 있다. 아침이슬이나 빗방울이 돌에 떨어지면 방심하는 순간 미끄러져 발을 헛딛기 딱 좋은 지형이다.

이렇게 유서가 깊은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팔영산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한 곳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관리인이나 대부분의 관광객은 만경암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제대로 서 있었던, 만경암 전투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은 현재 사라졌고, 산행하기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출입도 금지돼 있다.

송호철 위원은 “어린 나이의 많은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곳이다. 이 비좁은 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상상해봐라. 얼마나 마음이 찡한가”라며 “다시 알리고 싶은 역사이다. 군청 측에도 표지판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 설화 참조 및 인용: ‘만경암 전투에서 핀 꽃 두 송이’ 안오일, ‘고흥군 설화 동화’ 중)


● 설화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고흥(전남)|백솔미 기자 b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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