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서 하루 아침에 파산…그를 일으켜 세운 건 ‘문학’ 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4일 16시 42분


코멘트
나락으로 떨어진 건 한 순간이었다.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의료경영석사 학위를 딴 정재엽 씨(42)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약회사에 합류해 일하던 중 2013년 부도를 맞았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밑바닥에서 그가 절박하게 부여잡은 건 문학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런 경험을 담은 '파산수업'(비아북)을 출간한 그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 씨는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한 후 올해부터 직원 3명을 두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입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의 한 벽면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틈틈이 책을 읽는 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제 주머니에 꽂힌 책을 본 채권자들이 '뻔뻔한 거니? 아니면 강한 거니?'라며 어이없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책이 주는 에너지 때문에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어요."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파산자가 되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며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도 되돌렸다.

"제가 사라져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들어 줬어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을 보며 제 처지가 세 살 때 버림받은 모모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파산수업'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인용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이 수녀에게 원고를 보냈다. 이 수녀는 흔쾌히 수락한 것은 물론 휴대전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파산수업' 부제의 아이디어도 제안하고 추천사까지 보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이라는 부제는 수녀님 말씀의 일부분이 반영된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요."

부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봤던 그는 올해 2월 '안데르센 자서전'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못 사지만 중고책이라도 3년만에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하더라고요. 역경을 많이 겪었던 안데르센의 일생에 공감을 느껴 꼭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제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게는 그게 책이었어요.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바람막이가 돼 주고 에너지를 준 책이 없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