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2000년 전 멈춘 폼페이 ‘열쇠구멍 고고학’이 밝힌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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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사라진 로마도시의 화려한 일상/메리 비어드 지음/강혜정 옮김/588쪽·2만8000원·글항아리

폼페이 유적지 보관실 안에 놓인 한 남성 시신의 캐스트.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숨을 거둔 모습이다.
폼페이 유적지 보관실 안에 놓인 한 남성 시신의 캐스트.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숨을 거둔 모습이다.
지난해 초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폼페이 특별전’. 쭈그려 앉아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남자와 얼굴을 감싼 채 엎드린 여자, 집 안에 묶인 채 죽음을 맞은 개 등 다양한 캐스트(화산재 등 퇴적물이 쌓여 보존된 화석)를 한참 바라봤다. 누군가는 이미 체념한 듯했고, 다른 누구는 끝까지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던 모습이 생생하다. 한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서기 79년 8월 25일의 참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18세기부터 폼페이를 발굴한 서양인들이 지금껏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폼페이 시내에서 가장 넓은 ‘아본단차 대로’. 대로를 중심으로 각종 상점과 주택이 양옆에 늘어서 있다. 글항아리 제공
폼페이 시내에서 가장 넓은 ‘아본단차 대로’. 대로를 중심으로 각종 상점과 주택이 양옆에 늘어서 있다. 글항아리 제공
이 책은 최근의 다양한 고고학 연구 성과를 통해 폼페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상식을 깨뜨리는 지적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른바 ‘폼페이의 역설’(폼페이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것 같지만 의외로 일반인들이 잘못 알거나 무지한 게 많다는 뜻)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의 뇌리에 폼페이는 화려한 로마시대의 축소판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저명한 로마사 연구자인 저자는 폼페이가 로마를 대표할 만한 도시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인구도 최대 3만 명을 넘지 않는 소도시였고, 각종 도심 건물이나 조각들은 로마의 것을 본떴다. 역사적으로도 폼페이는 정통 로마인들이 아닌 기원전 6세기경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정황이 오히려 학자들에게는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로마시대 역사가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아 기록이 전하지 않는 부분을 규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보너스인 셈이다.

폼페이의 저택 중 하나인 ‘목신의 집’ 응접실 바닥을 장식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전투 장면을 묘사했다.
폼페이의 저택 중 하나인 ‘목신의 집’ 응접실 바닥을 장식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전투 장면을 묘사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진 수많은 인명의 급작스러운 죽음도 폼페이의 역설 중 하나다. 캐스트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대다수 폼페이 주민들이 아무런 징후도 느끼지 못한 채 일상을 영위하다 변을 당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각종 자연과학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폼페이 주민들 상당수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 지진 등을 통해 위험을 감지하고 피난을 떠났다. 장거리 여행이 여의치 않았던 만삭의 여인이나 서민들, 화산 폭발을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싶었던 귀족 등이 대폭발의 희생자가 됐다.

이민족에 한없이 관대했다는 팍스 로마나의 이미지도 폼페이에선 흔들린다.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동맹으로 제국에 서서히 편입되기 시작한 폼페이는 식민지가 된 직후에는 정치권력에서 차별을 겪게 된다.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고 나서 초기 수십 년 동안 선출된 폼페이 권력자들의 명단을 조사한 결과, 로마계 성(姓)만 보일 뿐 폼페이 원주민들의 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코셰르 가룸’(유대교 율법에 맞게 조리된 음식)이라고 표시된 대형 항아리와 인도인들이 섬긴 여신(락슈미) 조각상 등이 폼페이에서 출토된 건 로마인들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증거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00년 전 폼페이를 재현하기 위한 서구 고고학자들의 창의적인 연구를 정리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예컨대 로마 식민지가 되기 이전 초기 폼페이의 역사를 규명하기 위해 개발한 ‘열쇠 구멍 고고학’이 그렇다. 화산재가 쌓인 로마시대 유적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좁은 면적을 깊게 파 들어가는 독특한 발굴 조사 방식을 개발한 것.

이와 함께 수레가 디딤돌(도로 위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 인도 사이에 만든 징검다리)이나 도로 경계석과 충돌한 흔적을 정밀 조사해 폼페이 각 도로 구간의 교통 흐름을 알아낸 연구도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고고학자들은 폼페이의 좁은 도로에서 수레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일방통행로가 존재했기 때문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메리 비어드#폼페이 특별전#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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