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냉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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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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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열한 살의 어린 국왕이다. 깊은 밤,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다. 주방의 남자 숙수(熟手)들은 모두 퇴근했다. 냉면은 어차피 별미다. 궁궐 밖의 냉면을 사다 먹기로 했다. 마침내 냉면을 사왔는데 곁에 시립한 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돼지고기다. 수육이었을 것이다. 순조가 말한다. “그이는 먹을 것이 따로 있으니 냉면을 줄 필요가 없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른바 ‘순조의 냉면과 돼지고기’다. 순조 원년(1800년)의 일이다. 이유원은 1814년생이다. 어린 시절, ‘순조의 냉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유원은 돼지고기 수육을 숨긴 신하에게 냉면을 주지 말라고 한 순조가 “속이 좁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겨우 열한 살의 어린아이다. 오히려 이유원의 속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것은 1800년 무렵의, 참 평화로운 ‘냉면 테이크아웃’이다. 군왕이 독살 염려도 없이 궁궐 밖 음식을 테이크아웃한 것은 흐뭇하다.

냉면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한 이는 조선 중기의 문인 계곡 장유(1587∼1638년)다. 문집에 ‘자장냉면(紫漿冷면)’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했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옥가루같이 흰 국수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노을처럼 영롱한 자줏빛 육수의 냉면’이라고 표현했다.

냉면을 만든 재료는 메밀가루였다. 메밀은 글루텐 성분이 부족하다. 면으로 만들기 힘들다. 녹말을 넣고 힘겹게 면발을 만들었다. 메밀은 교맥(蕎麥)으로 표기했다.

정조 시절 현감을 지냈던 문신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과 유배지의 삶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저·침저)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했다.

이인행과 교분이 깊었던 다산 정약용도 18세기 말, 황해도에서 먹었던 냉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산시문집’에 나타나는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면숭菹碧)’이라는 문구다. 냉면과 배추김치(숭저)가 등장한다. 냉면의 육수가 배추김치 국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를 난처하게 한 돼지고기 수육은 비슷한 시대의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도 나타난다. 음력 4월의 평양 풍경을 이야기하면서 “냉면과 돼지수육의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18세기 전후하여 냉면과 더불어 돼지고기 수육, 배추김치 혹은 김치(동치미)국물을 더불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냉면은 귀하면서도 비교적 흔한 별미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유주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매월 초하룻날, 최 승지 집에 가서 냉면을 선물로 드렸다”고 기록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냉면이 선물 품목이기도 했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무렵에는 냉면이 별미이면서 길거리 식당들의 주요 메뉴로 등장한다. 도공 출신으로 분원(盆院)을 운영했던 하재 지규식은 “종로에서 냉면을 사먹었고 냉면값이 1냥”이라고 명기했다. 지규식은 한 달에 여러 차례 냉면을 사먹었던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의 신문에는 냉면에 관한 기사가 자주 오르내린다. 상당수는 냉면배달부의 파업에 관한 것이었다. 경성(서울)과 평양을 가리지 않고 냉면배달부의 파업은 속을 썩였다. 평양에서는 냉면배달부가 파업, 참다못한 시민들이 항의를 한다. 경찰서장이 냉면집 주인과 배달부 사이에서 파업을 중재한다. 동아일보 1938년 12월 1일의 기사는 퍽 드라마틱하다. 파업 주체는 ‘평양면업노동조합(平壤麵業勞動組合)’. 냉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다. 240명이 파업을 시작한다. 요구 조건은 11월 18일까지 임금 90전을 1원으로 올려줄 것. 냉면집 주인들은 “12월 1일 자로 임금을 올려주겠다”고 대안을 제시했다가 날짜를 12월 10일로 미룬다. 상황은 더 시끄러워진다. 이 기사 중에는 ‘냉면당(冷면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냉면 마니아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냉면 마니아들이 있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유행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영남주간기(동아일보 1935년 5월)’에서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 했다. 경성, 평양뿐만 아니라 남쪽의 지방도시에도 ‘한밤중 냉면배달’은 흔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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