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의 음악상담실]당신의 출근길에 ‘BGM’을 깔아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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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가방 안에 우산이 없습니다. 일기예보를 보고 챙기겠다고 했었는데, 또 깜빡한 모양입니다. (죄 없는 나이에 탓을 돌립니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려다가 그냥 비를 맞기로 했습니다. 낭만적일 것 같아서요.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도라지 위스키 한 잔도, 색소폰 소리도, 새빨간 립스틱의 마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완전히 흠뻑 젖었죠. 추천해 드릴 만한 멋진 낭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낭만이었습니다. 제 가슴 한 곳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있던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며, 그것들과 함께했을 때의 감정들을 다시 느꼈죠. 또한 어떻게 무엇으로 그 빈 곳을 채워 넣을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더 멋지고 매력적인 삶을 만드는 상상이었죠.

낭만은 이성 간의 로맨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것들을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파악할 때 경험하게 되는 감미로운 분위기와 기분도 낭만입니다. 논리에서 조금 벗어나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느끼고 싶은 대로 나와 내 세상을 보며, 나를 멋지고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만들 때 낭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사실적 삶은 퍽퍽합니다. 우리의 삶은 큰 의미가 별로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낭만은 그런 삶을 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스스로를 위한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죠. 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가 없을 정도의 자기기만으로 현실감을 잃지 않을 만큼 부풀려진 삶의 의미를 만드는 것입니다. 혼자 역할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삶을 소설, 드라마, 뮤지컬, 영화로 만들어서 그것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주인공으로 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자발적으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하죠. (이왕이면 더 멋진 사람으로 말이죠.)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가장 먼저 사랑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고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족스러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을 보완해 주는 것이 놀이입니다. 남이 떠먹여 주는 틀에 박힌 놀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자발적인 놀이는 재미와 더불어 자부심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제일 잘하니까요. 그것이 확장된 자의식, 낭만이죠. 결국 낭만은 돈이나 여유로운 시간보다는 호기심과 창의력과 융통성, 그것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공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비를 맞으며 생각해 보니 벌써 올해도 절반 가까이가 훌쩍 지나갔더군요. 이 세상의 급류에 휘말려 옳고 그름을 찾느라 감정보다는 이성, 개인보다는 집단에 집중했던 답답한 시간이었습니다.

건강한 삶에는 균형이 필수입니다. 감정과 사적인 삶도 필요하죠. 낭만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제 아내는 비 맞는 것을 싫어해서 다음에는 다른 방식으로 함께 낭만을 찾을 계획입니다. 함께 더 잘 살고 싶으니까요.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최백호#낭만에 대하여#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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