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흥분하면 지는 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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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도쿄 특파원
서영아 도쿄 특파원
자칭 ‘인터넷 우익 노인’이란 일본인이 “인터넷에서 당신 글을 읽었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알고 보니 일본의 혐한류 서적 붐을 비판한 기자의 칼럼을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번역해 혐한 사이트에 올려놓았고, 그걸 보고 반박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 다음번에 게재된, ‘일본 할머니들의 위풍당당’이란 칼럼엔 일본의 교육업체에서 인사 메일이 왔다. 한일 번역 교재로 썼다는 얘기였다. 구글 번역기 덕분일까. 한일 간에 뉴스가 언어의 장벽을 뚫고 실시간 공유되는 현실을 실감했다.

‘우익 노인’의 편지에서도 느꼈지만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지식은 상당하다. 여기에는 포털 사이트인 야후 저팬의 영향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 유력 매체들이 일본어판 사이트를 만들어 국내 뉴스를 야후 저팬에 실시간으로 대량 제공하기 때문이다.

“야후를 열면 한국 기사로 가득하다. 기분 좋은 내용도 아니다. 한국 언론이 왜 일본을 향해 서비스를 하느냐.”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다. 이들은 “일본 우익에는 빌미를 주고 일반 일본인에게는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고 우려한다.

독자의 클릭을 갈망하는 인터넷 뉴스의 속성 탓일까. 사이트들은 일본인들 눈에 자극적이고 한국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기사일수록 눈에 띄게 배치한다. 역시 클릭 수 때문이겠지만 일본 뉴스사이트에는 없는 댓글 기능도 달아 우익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가령 미국 NBC 평창 올림픽 해설자의 식민지배 옹호 발언에 대한 한국인들의 항의, 영국 더타임스의 독도 관련 오보처럼 일본 언론이 다루지 않는 기사가 이 사이트들의 톱5를 점한다. 욱일기 닮은 모자를 쓴 일본 선수 사진에 한국 소셜미디어가 들끓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이쯤 되면 요즘 일본에선 한국 뉴스에 관한 정보 과잉이 문제란 생각마저 든다. 대개 서로를 안다는 것은 가까워진다는 의미지만, 한일 간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한일 관계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일본 내 ‘혐한류’의 뿌리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찾는다. 일본인들이 그간 관심 밖이던 한국을 ‘발견’한 충격이 한쪽으로는 ‘한국 멋지다’는 한류를, 다른 한쪽으로는 ‘한국 뭐냐’고 반발하는 혐한류를 낳았다는 것.

혐한파 상당수는 한때 한국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이 좋아서 찾아가고 공부하다 보니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접하고, 결국 불쾌감이나 배신감을 느껴 돌아섰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무조건 반사 같은 것이라 본다. ‘감정’이기에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의식 체계와는 다르고 종종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한국인=반일’이라고 믿는 일본인들에게 “일본 방문 한국인이 연간 700만 명이 넘는다. 반일이라면 그렇게들 일본을 찾겠느냐”고 되묻곤 하지만 기자 또한 그 모순이 잘 이해가 안 된다.

1990년대 한국에서 유학한 NHK의 지인은 나름 터득한 해석법을 알려준다. “한국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자존심 때문에 겉으론 반일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따뜻한 속내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웬만한 한국인들의 호통은 정겹게 느껴지더라.”

NBC의 식민지배 옹호 발언에 한국이 들끓는다는 기사에 일본인들이 단 댓글에는 “사실이 아니라면 저리 흥분할 필요가 있나”라거나 “일본은 패전 뒤 미국에 점령당했지만 ‘미국을 발전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을 인정하고 전진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사실을 지우려 하기 때문에 항상 뒤만 돌아본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한국은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나라다. 먼저 흥분하면 지는 거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일본 혐한류 서적 붐#혐한류#nbc 식민지배 옹호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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