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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현대중공업 산파역… 50년간 600兆 부가가치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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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현대중공업 산파역… 50년간 600兆 부가가치 창출

이재웅 기자 입력 2016-02-04 03:00수정 2016-02-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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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일군 과학기술 50년]<上>산업발전의 견인차 KIST
‘과학 코리아’ 첫걸음 1966년 2월 3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에 최형섭 박사를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박 대통령은 전날인 2일 KIST 설립 정관에 서명하며 KIST 탄생을 공식화했다. KIST 제공
《 한국이 과학기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때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설립됐던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25전쟁 후여서 당장 먹을거리를 고민해야 했지만 정부는 미래를 내다보고 과학기술에 투자했다. 그 후 50년이 흘렀다. 현재 과학기술 분야 정부 출연연구기관은 KIST를 포함해 25개. 이 기관들의 연구는 반도체, 정보기술(IT), 자동차 등 한국 주력 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이제 출연연들은 새로운 50년을 준비하고 있다. 연구소 간 벽을 허물고 융합연구를 한창 진행 중이다. KIST 설립 50주년을 맞아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한 과학기술계를 3회에 걸쳐 조망한다. 》

정확히 50년 전인 1966년 2월 4일.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한미 공동지원사업계획 협정서’에 사인했다. 과학기술 불모지였던 한국에 최초이자 유일한 과학기술종합연구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한미 정부는 KIST 설립에 각각 1000만 달러(약 120억 원)씩 총 2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당시 쌀 한 가마(80kg) 값이 3000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연구소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일 KIST 설립 정관에 서명하고, 이튿날 최형섭 초대 소장(2004년 작고)을 임명했다. KIST 설립 1년 뒤인 1967년엔 과학기술 전담 정부 부처인 과학기술처를 신설했다. 50년이 지난 현재 KIST는 약 600조 원(기술경영경제학회 추산)의 사회·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 과학기술 인재의 저수조 역할

건물도 없이 시작한 KIST는 서울 청계천6가 한일은행 지점과 종로 YMCA 건물 5층 등을 전전했다. 하지만 미국을 돌며 연구 인력을 모은 최 소장의 노력 덕분에 첫해 실장급 과학자 18명을 유치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있던 사람과 국내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사람들도 KIST에 합류했다.

1969년 1차 준공식을 마치며 KIST는 현재 위치인 서울 성북구 화랑로에 자리 잡았다. 이때 지어진 KIST 본관은 현재 사적으로도 지정돼 있다. 안문석 전 고려대 부총장(한국벤처기술재단 이사장)은 “당시 서울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KIST로 옮기니 월급이 서울대 교수와 비슷해졌다”며 “실장급은 서울대 교수보다 3배쯤 많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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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연구실을 이끌면서 KIST에는 수평적인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연구원증을 가지고 있으면 교통경찰들이 봐줄 정도로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밤에 의무적으로 소등해야 하던 시절에도 KIST는 예외여서 연구소의 불은 24시간 꺼지지 않았다. 박원희 전 KIST 원장은 “인력 유출이 심각하던 시절, KIST가 생긴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박사들이 생겼다”며 “이들이 다시 국내 각 연구기관으로 흩어져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KIST는 과학기술 인재를 모으고 배출해내는 ‘저수조’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회상했다.

○ 벤 존슨 약물 적발도 KIST의 성과

KIST는 설립 목적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개발’이었던 만큼 산업계 현안을 조사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1969년 종합제철(현 포스코) 설립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고 필요한 기술계획서를 작성했다. 포스코 설립 당시 사실상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대형 조선소 건립의 필요성을 주장해 현대조선(현 현대중공업)을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다. 과거 KIST 경제분석실장으로서 이들 사업을 진두지휘한 윤여경 전 KIST 동문회장은 “KIST는 개발한 연구성과를 사업화하는 전담기구 K-TAC(한국기술진흥)을 1974년에 이미 출범시켰다. 이후 KIST의 성공을 본 대기업들이 민간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KIST는 국내에 컴퓨터를 처음 도입해 생산성 혁명을 이끌기도 했다. 대입예비고사 자동채점에서부터 전화요금관리업무 자동화, 정부 예산업무 전산화까지 KIST 전산개발센터가 관여했다. 절정은 1988년 서울올림픽 전산화시스템이었다. 성기수 전 동명정보대 총장(당시 KIST 전산개발센터 소장)은 “미국에서 사오면 500만 달러가 들었는데 KIST가 10분의 1 비용으로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올림픽 전산화 시스템이라는 찬사를 들었다”고 말했다. 1986년 KIST에 설립된 도핑컨트롤센터가 100m 달리기 선수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을 밝혀낸 일은 잘 알려진 사례다.

○ 융합 연구의 선두주자

KIST에도 위기는 있었다. 과학기술종합연구소인 KIST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연구실은 이후 15개 출연연으로 파생돼 나왔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국가 혁신 체계의 모태가 됐지만 인력이 빠져나간 KIST는 공동화(空洞化)의 위기를 감수해야 했다.

이때 KIST는 산업계의 현안을 다루는 데 머물지 않고 세계 최초, 최고를 향한 미래원천 연구를 시작하며 위기를 돌파했다. 국내에 뇌 연구를 처음 도입했고 세계 최초로 스핀트로닉스 소자를 개발하는 성과를 냈다.

21세기 들어 KIST는 융합 연구를 통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생명과학, 컴퓨터시스템, 기계공학 연구자가 한데 일하는 KIST는 국내 최대 종합연구소로서 융합 연구에 가장 적합한 연구소다. KIST는 최근 치매 조기진단 시스템을 개발해 3300억 원에 기술 이전을 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
#포스코#현대중공업#산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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