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수출형 대기업이 협력사들을 끌어주는 ‘외끌이 모델’을 통해 성장해왔다. 대·중소기업이 하나의 가치 사슬로 엮여있는 이 모델은 경기가 활황일 땐 다함께 성장하지만 최근처럼 중국과 같은 강력한 후발주자가 등장하거나 환율 하락, 경기 부진 등으로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면 경쟁력이 약한 기업은 도태되는 결과를 낳는다.
동아일보는 산업연구원과 함께 자동차, 전자, 철강, 조선, 기계 등 5개 업종의 주요 대기업 8곳에 납품하는 1, 2차 협력사 1186곳의 1999∼2013년 매출, 영업이익, 부채비율, 연구개발(R&D) 투자액, 임금 등 경영지표를 분석해봤다. 8개 대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포스코,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두산인프라코어였다. ○ 재무구조는 개선, 채산성은 후퇴
조사 결과 한국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중소 협력사들은 외환위기 이후 재무건전성은 개선됐지만 채산성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그룹 계열사(현대모비스 등)가 아닌 협력사들의 부채비율은 1999년 210.8%에서 2013년 115.7%로 개선됐지만 영업이익률은 5.0%에서 3.4%로 악화됐다. 삼성전자 협력사들도 부채비율은 73.1%에서 63.5%로 좋아졌지만 영업이익률은 10.8%에서 4.2%로 떨어졌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대기업과 협력사 간, 또 협력사들 간에 영업이익과 임금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이 발견됐다. 2008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이 5.7%에서 2013년 13.8%로 증가하는 동안 협력사의 영업이익률은 4.6%에서 4.2%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현대차그룹 계열 협력사들의 영업이익률이 8.2%에서 9.3%로 증가하는 사이 비계열 협력사들의 영업이익률은 3.6%에서 3.4%로 내려갔다.
현대차그룹 계열 협력사의 평균 급여를 100으로 봤을 때 비계열 협력사들의 급여 수준은 2008년 64에서 2013년 59로 격차가 커졌다. LG전자 협력사들 중 연매출이 5000억 원 이상인 기업들의 평균 급여를 100으로 봤을 때 연매출 1500억 원 이상 5000억 원 미만인 업체와 연매출 1500억 원 미만인 업체들과의 급여 격차는 2008년 ‘100 대 106 대 84’에서 2013년 ‘100 대 87 대 61’로 벌어졌다.
대기업들은 해외 진출과 규모의 경제 구축, 품목 다변화 등을 통해 영업이익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특정 품목과 대기업 한두 곳에 매출을 의존하는 중견·중소기업들은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대해 협력사들은 양극화의 원인에 대기업에 유리한 계약 방식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A사의 한 관계자는 “중국업체와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기업들의 납품단가 인하 압박이 세지고 있다”며 “일부는 우리가 감내하지만 나머지는 2, 3차 업체에 전가하는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B사의 한 관계자도 “우리가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해 원가를 절감하면 그 수익의 절반을 대기업이 가져간다”고 지적했다.
○ 국내 대기업에만 매출 의존
최근 현대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등 대기업이 실적이 악화되자 조선, 기계 중소기업들의 실적이 함께 추락하고 있다.
조선 협력사들도 2013년 매출이 전년 대비 17.6% 감소했고, 영업이익률이 2년 전(7.7%)의 10분의 1 수준인 0.7%로 떨어졌다. 조선 1차 협력사 관계자는 “2008년 이후 매년 5∼10%씩 현대중공업에서 나오는 일감이 줄면서 잔업도 없어지고 직원들 급여는 15∼20% 줄었다”며 “협력사 일부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은행 패스트트랙 절차를 밟고 있다”고 덧붙였다.
2013년 두산인프라코어 협력사들의 매출은 2012년보다 평균 2.6% 줄었고, 영업이익률은 2.5%로 2년 전(6.3%)의 3분의 1로 떨어졌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내 생산물량을 해외로 돌리거나 사업을 내재화(아웃소싱 하던 것을 자체 생산)하면 중소기업들은 자연스레 일감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 “대기업에 의존말고 자체 기술력 키워야” ▼
○ R&D 부진→자생력 결여 악순환
1186개 기업의 연구개발(R&D) 집적도(매출액 대비 R&D 투자액 비중)도 선진국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협력업체들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면 일부 대기업에 매출을 의존하게 되고, 대기업만 믿고 자체 R&D를 소홀히 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013년 세계 2500대 R&D 투자기업들의 업종별 평균 R&D 집적도는 △자동차 부품 4.1% △전자 부품 4.3% △기계 부품 2.5% △철강 0.9%였다. 그러나 같은 해 국내 협력사들의 R&D 집적도는 △현대차 계열 협력사 2.0%, 비계열 협력사 1.8% △삼성전자 협력사 2.3%, LG전자 협력사 1.4% △기계 협력사 1.1% △철강 1.0% 등이었다. 철강을 제외하곤 모두 세계 2500대 기업 평균의 절반 수준이었다.
전자 1차 협력사인 C사는 지난해 영업적자가 약 3배로 늘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처음엔 우리도 획기적으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대기업을 고객으로 만들었지만, 안정적인 매출처가 생기고 대기업에서 시키는 R&D만 하다 보니 다른 신기술을 개발하지 못했다”며 “전자업계는 기술 변화가 워낙 빨라 언제 매출이 ‘0원’이 될지 모른다”고 털어놨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경제의 ‘허리’인 중견·중소 협력업체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대기업과의 수평적 협력 체계의 구축과 자생적 R&D를 통해 전문화 국제화 대형화를 이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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